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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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2014-09-23

<제목> :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1)

<본문>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서론>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와 <마 5장>에 나오는 팔복, 그리고 <고전 13장>의 사랑장 말씀은 신앙을 점검하는데 있어서 척도가 되는 말씀들이지요. 얼마나 영으로 들어왔고, 어느 정도의 믿음의 분량에 이르렀는지를 이 말씀들에 비추어 보면 점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거나, 성경을 지식적으로 많이 안다고해서 믿음이 큰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러한 영적인 열매들이 얼마나 맺혀있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토록 사모하는 ‘새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최종 목표에도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와 팔복, 그리고 사랑장의 열매가 맺혀있을 때라야 적어도 믿음의 4단계에는 들어왔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에 가고자 할 때, 목표지점을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과는 전혀 상황이 다릅니다. 예를들어 전라남도 ‘무안’에 간다고 합시다. 본교회에서 출발하여 무안에 가려면 중간에 거치게 되는 곳들이 많지요. 그 중에는 수원, 대전, 광주 등 큰 도시도 있을 것이고, 작은 읍, 면 단위의 마을도 있을 것입니다. 작은 마을의 이름까지도 다 기억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대충 큰 도시들만 기억하는 분들이 더 많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큰 도시 정도만 알고 있어도 ‘아, 내가 지금 어디쯤 왔구나’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왔고, 또 앞으로는 얼마나 가야 하는지, 다음에 지나야 할 도시는 어디인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금 ‘무안’이라고 하는 목표점을 향해 바르게 가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가고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목표를 분명히 알고 있고, 또 그 목표를 가기위해 거쳐야 하는 도시나 마을들을 제대로 알고 길을 갈 때, 그 사람은 목표지점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이 땅에서 어떤 장소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설령 자신은 전혀 길을 모른다해도 길을 아는 사람만 따라가면 갈 수도 있겠지만, 천국에 가는 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천국은 옆사람을 따라 간다고 해서 함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믿음으로 구원받아 가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가 천국가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천국에 가는 그 길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 66권 안에 들어있지요. 하지만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모두가 성경 66권의 말씀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믿음이 성장하여 영으로 들어올수록 66권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마음에 영으로 일구게 되지만, 그것을 다 기억하지는 못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목표하는 천국, 그 중에서도 새예루살렘에 바로 가기위해서는 설령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다 알지는 못한다해도 꼭 알아서 기억해야 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바로 무안에 가는데 있어서 제대로 가기위해서는 작은 마을까지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해도 큰 도시들은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이처럼 큰 도시의 역할, 즉, 목표점을 가는 중간 중간에 큰 정거장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말씀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와 팔복, 그리고 사랑장의 말씀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가기 위해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해 나가는 동안 이러한 말씀들은 반드시 알고 깨우쳐서 양식삼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자신이 지금 천국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얼만큼 성결되어 새예루살렘에 가까워졌는지 또 신랑되신 우리 주님은 얼마나 닮았는지를 분별하여 알고 신앙생활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 22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했는데, 그러면 먼저 ‘성령의 열매’란 무엇일까요? ‘열매’란 씨를 뿌렸을 때,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우면서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열매’ 역시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오심으로 이제까지 죽어있던 영이 살아나고, 그래서 살아난 영이 점차 성장함으로 맺게되는 열매이지요.
성령이 오시면, 성령께서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우쳐주십니다. 또한 마음을 주관해서 죄와 불법 등의 육을 버리고 변화되어 의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래서 천국에 갈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육적으로 비유하면 하나의 발전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전기가 돌아감으로 전기가 발생하고 이 전기가 전구에 공급되어 빛을 발하지요.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심으로 육에 속한 어두움들이 물러가고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라고 하는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발전기가 있다고만 해서 전기가 생기고 빛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 발전기를 가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이라고 하는 발전기를 주셨으되, 이 발전기를 가동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성령이라는 발전기가 힘차게 가동하여 성령의 열매 즉,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기 위해 항상 깨어 불같이 기도하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성령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좇고자하는 것을 바로 성령의 소욕이라고 하는데, 이 성령의 소욕을 좇아 열심히 행해 나갈 때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신속히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성령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소욕이 있는데,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이 육체의 소욕은 아직까지 우리 안에 남아있는 비진리의 마음을 좇아 갖가지 죄와 불의와 불법들을 행하고자 하지요. 그래서 이 육체의 소욕을 좇다 보면 성령께서 탄식하시므로 마음에 곤고함이 찾아오고, 점점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가므로 성령의 소욕을 좇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서로가 상반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자 합니다. 성령의 소욕은 우리를 빛으로 이끌고자 하지만, 육체의 소욕은 우리를 어두움으로 이끌고자 하지요.
그래서 <갈 5:16-17>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비진리의 어두움의 마음을 좇아 행하고자 하는 육체의 소욕을 좇는다면 그 열매는 죄와 불법인 육체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육체의 일이라는 열매를 낼 때,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갈 5:19-21>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갈 6: 8>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말씀한대로, 육을 좇아 행하면 그 결과는 썩어질 사망이요, 성령을 좇아 행하면 그 결과는 영생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요, 성령의 소욕을 좇는 자가 되어, 날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열매는 바로 ‘사랑’입니다.
<요일 4:7-8>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근본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도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을 안다 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해도 다 같은 사랑이 아니지요. 바로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사랑과 세상에 속한 육적인 사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에게 주셨던 사랑은 영적인 사랑이었지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죄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래서 영이 죽고 난 후부터는 사랑 역시 자기적인 사랑인 육적인 사랑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참으로 영적인 사랑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오직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고 마는 육적인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참된 사랑인 줄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의 사랑도 그렇지요. 결혼하기 전에는 서로가 ‘당신 없으면 못산다’고 하며 그 사랑이 변치 않을 것처럼 말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어떻던가요? 대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상대를 힘들게 하며 쉽게 이혼까지 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는 그러한 부모의 사랑도 있긴 하지만, 점차 이러한 사랑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간에도 서로 등을 돌리고 미워하며 자기 유익만을 좇는 모습들이 비일비재하지요.
이밖에도 형제간이나 친구간의 사랑 역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적인 사랑이 많으며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로부터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해도 대부분은 내가 사랑을 준 만큼 상대로부터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내가 충만할 때는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해도 시간이 지나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으니 결국 이것도 받기위해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이 육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에 속한 영적인 사랑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고전 13:4>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가 잘 나와 있지요. <4-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랑이지요.

그런데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의 사랑은 <고전 13장>에 나오는 사랑보다도 한차원 더 높은 사랑으로서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을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 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내 생명까지 줄 수 있고, 내 형제를 위해서 생명을 줄 수 있는 이러한 희생이 포함된 사랑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은 자기적인 것이 전혀 없는 온전한 사랑이지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주면서도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러한 사랑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설령 하나님께서 축복주시지 않고 어렵게 놔두셔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요,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요구하거나 나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없이 대가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줄 수 있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우리 안에서 육을 버리고, 죄와 악과 불법을 버리므로 성결되어진 만큼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죄를 버리고 악이 없었던 믿음의 선진들이 이러한 사랑을 했던 것을 보게 되지요. 모세나 사도바울은 설령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 할지라도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우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들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보이셨던 것처럼, 주님을 닮은 사람들 역시 생명까지 주시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사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장에 나오는 사랑 위에 생명까지 주는 희생적인 사랑,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히 주기만 하는 사랑, 바로 이러한 사랑을 포함하는 사랑 말입니다. 이 사랑의 열매가 얼마나 맺혀있는가를 점검해 보면 우리가 성결을 얼마나 이루었고,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되어 새예루살렘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요 3:6>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을 심으면 그 육으로부터 육의 열매를 거두게 되지만, 성령으로 심으면 영의 열매를 거두게 되지요. 날마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갈 때, 그 열매가 바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이 생명과 능력이 되어서 이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받기를 바라며 마침내 변질되고 마는 육적인 사랑을 모두 벗어버리고 성령의 열매인 온전한 영적인 사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우리 모두가 되어서 사랑의 결정체인 천국, 그 중에서도 가장 온전한 사랑을 이룬 사람만이 들어가는 새예루살렘에서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